서림광역시의 양극화
주거지에 관한 고찰로 봄을 열고 양극화로 봄을 닫은 도시. 밴쿠버의 포인트 타워와 세종시 나성동을 참고해 조망권을 나눈 사람이, 계절의 끝에서는 불법주차와 전봇대와 빛공해를 찍었다.
3월의 마지막 날, 영상 하나와 함께 긴 글이 올라왔다. 제목은 꿈의 도시였고 부제는 주거지에 관한 고찰이었다.
도시를 짓는 게시판에서 고찰이라는 단어는 흔하지 않다. 대개는 완성했다, 만들어 봤다, 근황이다. 그리고 그 단어를 고른 이유가 첫 문단에 적혀 있었다. 영상에서 해야 할 말이지만 영상에 넣으면 지루해지니 카페를 빌려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다.
01고층을 좋아하는 사람
글은 자기 취향을 밝히는 데서 시작한다. 옹기종기 모인 고층 건물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가상 세계관을 만들어 도시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때도 고층 건물이 모여 있는 모습을 좋아했다는 것. 그러고는 한 줄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뭔가 비현실적인 것 같기도 하다고.
취향을 적어 놓고 곧바로 의심하는 문장이 이어지는 구성인데, 그 뒤로 나오는 내용이 실제로 그 의심에 답한다. 좋아하는 밀도를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살 만한 형태로 만들 수 있는지가 글의 나머지 전부다.
02조망권을 나누는 방법
첫 구역은 호수공원을 낀 곳이다. 고층 건물을 호수 쪽으로 바라보게 배치해 조망을 주고, 저층에는 테라스와 마당을 설계해 호수와 자연에 가까이 살도록 했다. 호수가 보이지 않는 뒤쪽에는 도시 중간중간 숲길을 내어 저층부에도 조망을 만들었다.
여기서 고층은 35층 이상을 말한다고 그는 괄호를 열어 밝혀 두었다. 보통의 신도시에는 12층에서 22층 정도의 중고층 아파트가 많고 재건축의 경우 35층인데, 그런 제한 속에서 수익성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비슷한 평면이 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 따라붙는다.
그래서 그가 고른 답은 도시 중심지에만 고층을 몰아넣는 쪽이었다. 중심에는 중소형 평형을 채워 1인·2인 가구가 도시의 편의를 누리면서도 자연에서 멀지 않게 하고, 저층 구역은 대형 평수와 테라스 평면으로 가족을 겨냥했다.
좋아하는 밀도를 어떻게 하면
사람이 살 만한 형태로 만들 것인가.
03밴쿠버와 세종시

다음 구역의 아이디어는 세종시 나성동에서 왔다. 고층 주상복합을 서로 엇갈리게 배치해 뒤쪽에도 조망을 남기는 방식이고, 여기에 유튜브에서 본 밴쿠버의 도시계획을 겹쳤다. 밴쿠버이즘이라 불리는 포인트 타워는 저층부에 테라스와 타운하우스 세대를 두고 상층부의 조망을 유지해, 아파트의 답답함을 덜어 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도심에서 먼 구역은 7층짜리 저중밀도로 채웠다. 역에서 멀어 교통은 불편하지만 BRT는 여전히 들어오고, 대신 자연환경과 가족이 쓸 공간이 넉넉하다고 그는 적었다. 중앙역 주변에는 오피스와 산업단지를 두고 멀지 않은 곳을 초고층 주거로 만들어, 출퇴근 거리가 짧은 1~2인 세대를 앉혔다.
트램길도 있다. 양옆으로 자율주행 도로와 자전거가 함께 다니는 보차혼용도로를 두어 보행자를 우선하고, 차량은 최대한 제한하는 대신 트램과 전기버스와 S-BRT로 자가용만큼 편하게 다니도록 했다는 것. 트램길의 폭은 홍대 거리와 광화문 광장의 중간쯤으로 잡았고, 노점상과 쉴 자리를 함께 넣었다.
긴 글은 힘들었다는 괄호와 함께 끝난다. 도시 짓는 사람이 자기 도시의 용적과 평형과 조망권을 이만큼 적어 두는 일은 드물다.
04어촌으로 돌아온 도시
나흘 뒤 서림광역시가 돌아왔다. 부활이라는 제목이 붙었고, 돌아온 자리는 어촌이었다. 바닷가 바로 앞의 청해역을 소개하면서 그는 괄호 안에 세 단어를 적었다. 횟집 횟집 횟집.
같은 글에는 퀴즈가 하나 붙어 있었다. 사진 속 나들목이 실제로 어디인지 맞히면 소정의 칭찬을 준다는 것이었고, 만드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는 말이 괄호로 따라붙었다. 도이교차로, 안현, 조남, 구리가 차례로 나왔다가 다 빗나갔고, 옆에 천이 있다는 힌트 끝에 공항신도시가 정답으로 나왔다. 곧바로 그것은 나들목이 아니라 분기점이라는 정정이 달렸다.
직전에 올라온 글도 실재하는 구조물이었다. 인천대교를 지나 영종대교를 바라본 구도로 찍은 사진들이었고, 마지막은 공항 제1터미널이었다. 이제 떠난다는 문장 아래에 괄호가 하나 열려 있었다. 여기에 다른 사람의 여행 스크린샷을 이어 붙이면 일본 여행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
05서울역에서 출발하기
4월 중순에는 주행 영상이 올라왔다. 서울역에서 서림역까지 KTX를 타고 가는 영상으로, 실재하는 역에서 출발해 가상의 역에 도착하는 구성이다. 어디에 있는 도시인지 지도로 설명하는 대신, 서울에서 몇 시간이면 닿는 곳이라고 말하는 방식이었다.
만드는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여러 번 수정해 겨우 만든 영상이라는 말이 앞머리에 붙어 있고, 왜 손을 봤느냐는 물음에는 KTX 출발과 도착 안내방송의 음악 때문이라는 답이 달렸다. 소리를 확 줄여 다시 올리니 그제야 넘어갔다고 한다.
서울역 부분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지난해 추석에 서울역 시네마틱을 만들며 지어 둔 것을 이번에 다시 꺼내 썼고, 잘 만들어 둔 것이니 돌려쓸 수도 있다는 괄호가 붙어 있다. 서울 전체를 만든 것은 아니어서 한강 끝이 비어 있다는 고백도 함께였다.
06다닥다닥

4월 27일, 이 봄을 요약하는 글이 올라왔다. 제목은 서림광역시의 양극화였다.
본문은 기술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만든 자재로 제대로 골목길을 만들어 봤고, 겹쳐 놓는 도구로 말도 안 되게 서로 붙여야 하는 것이었다는 깨달음이었다. 다닥다닥 붙으니 보기 좋다는 댓글에는 다닥다닥이 이 자재의 목적이었나 보다는 답이 달렸다.
사진 설명은 짧게 이어진다. 파란 하늘 아래 서림광역시, 양극화란 이런 것이겠죠, 위에 아파트는 거의 무릉도원입니다, 상공에서 보니 더욱 극명하군요. 히어로 사진이 그 문장들의 근거다.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이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고, 전선이 얽힌 전봇대가 화면을 세로로 가르며, 골목이 끝나는 자리 너머로 흰 고층 아파트 한 동이 솟아 있다.
댓글에서 그 구도가 한 번 더 확인된다. 한국은 비싼 아파트를 다 산에 짓는다는 말에, 정말 비싼 아파트는 강변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느 세탁소 간판이 옆옆 건물에도 있으니 프랜차이즈냐는 지적도 달렸다.
이틀 뒤 그는 그냥 삘 받아서 찍었다는 사진 열두 장을 올렸다. 설명은 한 줄씩이다. 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면 집들이 있지요. 불법주차는 한국식 도시의 근본. 역시 빽빽해야 이쁩니다. 인도 위에 주차된 차까지 완벽 그 자체. 해 질 때 붉은 벽돌이 더 붉게 물드는 시간. 빛공해.
댓글은 전부 같은 방향이었다. 왜 우리 할머니 집을 썼느냐는 항의에 제 이모 집이라는 답이 붙었고, 왜 우리 동네가 보이느냐는 말과 신림동 같다는 말과 성북 같다는 말이 나란히 달렸다. 주거지에 관한 고찰로 시작한 계절이 남의 동네처럼 보이는 골목으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