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UR, 도로가 바뀌던 달
차로 단위로 도로를 조합하는 체계가 봄에 퍼졌다. 반포대교와 잠수교가 만들어지고 신호 없는 도로망이 완성되는 사이, 진입장벽과 용량을 두고 긴 논쟁이 붙었고 결국 포기한 사람도 나왔다.
도시를 짓는 도구는 가끔 한 번씩 크게 바뀐다. 2020년 봄, 그 변화의 대상은 도로였다.
01차로를 조합한다는 것
기본 게임의 도로는 정해진 규격으로 나온다. 2차로, 4차로, 6차로. 그런데 실제 도로는 그렇지 않아서, 3차로가 5차로가 되었다가 램프가 빠지면서 4차로로 줄고 갓길이 붙었다 사라진다.
CSUR은 그 사이를 채우는 체계다. 차로 단위로 도로를 조합해 실제처럼 늘어나고 줄어드는 선형을 만들 수 있게 하는데, 겨울에 새 판본이 나오면서 부품을 골라 쓰는 도구가 함께 붙었다. 그전까지는 부품마다 아이콘을 외워야 했고, 겨우 다 외웠더니 새 판본이 나와 힘이 빠진다는 말이 댓글에 남아 있다.
1월에 사용 후기를 올린 사람은 난이도를 이렇게 정리했다. 만드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고 다만 맞는 것을 찾는 노가다가 필요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며칠 뒤 그는 동작대교 남단을 올리면서 본문에 세 글자만 적었다. 노가다.
결과는 곧바로 사진에 나타났다. 반포대교와 잠수교가 재현됐고, 봄이 되자 실제 도면에 가까운 입체교차로가 줄줄이 올라왔다.
02육백 개의 부품

3월 초, 여러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이 체계를 시험했다. 어떤 이는 첫작이라고 적었고, 같은 날 다른 두 글의 제목은 어딘가 좀 모자란 CSUR과 쓸데 없는 CSUR이었다.
모자란 쪽의 불만은 구체적이었다. 버스전용도로를 뺀 풀세트를 다 받았는데도 부족한 것이 너무 많고 반대로 불필요해 보이는 것이 대다수이며, 도로를 연결하려 해도 정작 맞는 도로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용하다 보면 분명 필요한 상황을 만들었는데도 그 도로가 없다는 말이 뒤따랐다.
쓸데없다는 쪽의 셈은 더 노골적이었다. 부품이 600개가 넘는데 많으면 뭐 하냐 쓸데가 없다는 것. 주 항목에서는 인도와 자전거도로의 유무에 따라 도로가 따로 있었는데 기본 항목에서는 인도가 달린 도로에 죄다 자전거도로가 붙어 있어 서로 호환이 안 된다는 지적이 이어졌고, 높은 진입장벽과 대용량을 감안하면서까지 써야 할지 의문이라는 말로 글이 끝났다.
댓글에서 반박이 붙었다. 첫 번째 사진의 구조는 반대편으로 일방통행 도로를 그어 주면 되고 연결점을 겹쳐 그어도 다 작동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요지는 그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양방향 도로를 쓰려 할 때 맞는 것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고, 결론은 이렇게 정리됐다. 아예 이 체계를 쓸 거면 도시 도로 전체를 이것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
많으면 뭐해
쓸데가 없다.
03신호가 없는 도로망
한편에서는 이 체계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밀어붙인 사람이 있었다. 1월에 나타나 고차원적 도로망 디자인이라는 제목으로 사각형 하나를 올린 이였는데, 안쪽을 고밀도로 개발할 예정이며 파리의 라 데팡스처럼 인도와 도로망을 다층으로 쌓아 차량과 사람이 모두 편하게 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판본이 올라가면서 아주 효율적인 도로망 구성이 가능해졌다는 평가와 함께, 일방통행 도로를 터널로 만들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는 단서도 달렸다. 참고한 자료가 있느냐는 물음에는 어디를 보고 따라 그은 것이 아니라 자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간 날 때마다 찍찍 그어 가며 연습했고 이상적인 도로망 구조는 원래부터 머릿속에 넣어 두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1월 26일 완성작이 올라왔다. 제목은 신호 없는 완전 입체 도로망이었고, 첫 댓글은 차량천국 보행자지옥이라는 여덟 글자였다. 답이 곧바로 달렸다. 도로 위쪽으로 광장을 덮어 보행자 친화적 공간을 만들 예정이고 저 도로망의 반 정도는 가려질 것이라는 답이었다. 이렇게 멋진 것을 왜 반이나 가리느냐는 항의가 그 아래 붙었다.
차선 변경 때문에 결국 막힐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실제로도 쉽게 막히는 구조라며 광안대교의 한 램프가 예로 들렸다. 그는 왼쪽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나가는 차와 그 반대로 가는 차가 꼬이지 않도록 안배는 나름 철저히 했다고 답하면서도, 완벽하지 않을 테니 차선 연결을 다시 해 주고 정 안 되면 구조 수정도 필요하겠다고 덧붙였다.
04포기한 자의 몸부림

그리고 3월 26일, 이 계절에서 가장 정직한 제목이 올라왔다. CSUR 포기한 자의 몸부림.
본문의 첫 줄은 선언이었다. 그렇습니다, 전 CSUR 포기했습니다. 그 많은 자재를 감당하지 못해 그냥 직접 만들었다는 설명이 이어지고,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없으면 만들라, 그게 내 장점.
만든 이유는 그가 짓던 도시에 있었다. 홍콩은 고가도로 분기점이 너무 많다는 한 줄이 사진 사이에 적혀 있다. 결과에 대한 평가도 스스로 내렸다. CSUR이면 홀쭉해질 텐데 직접 만드니 뚱뚱해진다는 것이었고, 마지막 사진에는 도로계 외래종 노답 삼형제라는 설명이 붙었다.
댓글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자리를 짚었다. 아무리 이 체계로 이리저리 해도 기본 도로를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데는 못 미치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과정이나 성취감이나 그렇다는 말과, 막대한 부품이 부담되고 어렵기도 하다는 말이 이어 붙었다. 앞으로 끔찍한 도로 데칼 작업만 남았다는 위로 아닌 위로도 하나 달렸다.
포기 선언에 도구를 탓하는 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옛날에는 몇 개 정도 짜깁기하면 그럴듯한 것 하나는 만들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양이 너무 많아져 짜깁기도 못 하겠다는 회고가 다른 글에 남아 있고, 아름다운 결과물보다 복잡한 시스템과 용량으로 인한 비효율이 더 크게 느껴진다는 평가도 나왔다.
05도구가 도시를 바꾼다
2020년 봄의 게시판을 앞선 계절과 비교하면 도로의 표정이 달라진 것이 보인다. 차로가 더 유연하게 갈라지고, 램프가 더 자연스럽게 빠지며, 교차로가 실제 도면에 가까워졌다.
도구가 바뀌면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뀌고,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뀌면 만들고 싶은 것도 바뀐다. 반포대교를 만들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반포대교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그것이 선택지에 없었다.
다만 그 봄에 남은 것이 도로만은 아니었다. 히어로 사진의 입체교차로를 만든 사람은 그것이 수원 맵이라고 밝힌 뒤, 세이브 파일에 오류가 나서 더는 못 본다고 적었다. 같은 도시를 두고 한국민속촌은 만드느냐는 물음이 오간 직후였다.
이 매거진이 여섯 호에 걸쳐 도로 이야기를 이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톨게이트에서 시작해 수도고속도로의 기둥과 도심 고가도로와 서울역 앞 교차로를 지나 이제 차로 단위로 조합하는 체계에 닿았다. 포기한 사람이 손으로 만든 도로 이야기는 이번 호 Places 섹션의 도시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