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도 서북부
10월, 마인크래프트 서버의 한 섬에서 문서 세 건이 잇따라 올라왔다. 도시의 행정보고서, 이웃 군수의 요청으로 대신 그린 계획도, 그리고 세 도시의 시내버스 체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개편안이다. 간선과 지선과 순환과 급행을 나누고 권역에 번호를 매긴 문서.
마인크래프트 서버에서 도시를 다루는 글에는 말머리가 붙는다. 도시등록, 도시행정, 광역행정, 계획도. 어떤 종류의 문서인지가 제목 앞에 먼저 표시되고, 본문은 대체로 항목을 번호로 나눠 적는다.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글도 드물지 않다.
10월 초순, 한 사람이 그 말머리를 차례로 갈아 끼우며 문서를 세 건 올렸다. 도시행정으로 자기 도시의 보고서를 내고, 계획도로 이웃 도시의 도면을 올리고, 광역행정으로 세 도시에 걸친 개편안을 냈다.
01행정보고서
첫 문서는 들안시 행정보고서였고, 항목이 다섯이다. 도시 이름은 한글과 한자와 로마자 세 가지로 적혀 있고, 그다음이 위키에 등재된 도시 문서 링크이며, 세 번째가 도시 내 건축 현황이다.
건축 현황은 두 줄로 나뉜다. 배치가 완료된 건축물이 두 채이고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으며, 임시로 배치된 건축물이 열한 채다. 완료와 임시를 구분해 세는 방식인데, 네 번째 항목인 주거 세대 수도 임시 배치 건축물을 포함했을 때의 숫자라고 단서를 달아 놓았다. 세대 수와 인구를 함께 적고 인구 뒤에 추정이라는 괄호를 붙였다.
다섯 번째는 장기 발전 계획이다. 도로망 선형 완성이 11월로 잡혀 있다. 도시의 미래를 서술이 아니라 기한으로 적는 방식이고, 이 서버의 문서들이 대체로 그렇다.
02대신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올라온 계획도는 자기 도시의 것이 아니었다. 제목은 서면군 도시계획안이고 날짜가 괄호 안에 붙어 있는데, 그림 아래 적힌 두 줄이 이 문서의 성격을 밝힌다. 위 도로망은 계획일 뿐이며 유동적일 수 있음을 알린다는 단서가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사유가 적혀 있다. 서면군수의 요청에 따라 들안과 서면의 화합과 도시 연담화를 위하여 대신 계획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남의 도시를 대신 계획한다는 것은 이 서버의 제도 안에서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도시는 신청서를 낸 사람이 재량권을 받아 운영하는 단위이므로 계획도 그 사람이 그리는 것이 기본인데, 여기서는 이웃 도시의 책임자가 요청했고 그 이유가 두 도시를 이어 붙이는 데 있었다.
댓글에서 협업의 범위가 드러난다. 세부 도로망은 직접 그어 주시면 될 것 같다는 말이 붙어 있는데, 큰 골격은 대신 잡아 주되 안쪽은 각자 채우라는 분담이다. 들안과의 아름다운 연계 개발을 위하여, 라는 인사가 그 아래 붙는다.
지면에 실은 도면에서 실제로 그려진 것은 도로망과 두 개의 용도 구역뿐이다. 노란 구역과 분홍 구역이 지도의 동남쪽에 붙어 있고 나머지는 회색 선만 그어져 있으므로, 이 문서가 보여 주는 것은 완성된 도시가 아니라 앞으로 채워질 자리다.
03권역은 일곱, 번호는 아홉
사흘 뒤에 올라온 세 번째 문서에는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제목에 광역행정이라는 말머리와 세 도시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고, 부제는 시내버스 체계 통합이다.
개요는 문제 상황에서 시작한다. 각 도시가 설립된 이후 지속적인 개발로 교통량이 늘어 세 도시 모두 버스를 대안으로 채택하게 되었는데, 세 도시의 버스가 각자 독단적인 체계를 쓰는 과정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세 도시가 권역을 나눈 뒤 재조정하기로 했고, 재조정이 끝나면 시민들의 혼란과 서로 달랐던 요금 문제가 정리되어 편의성이 나아질 것으로 보인다는 전망이 붙는다.
노선은 운행 특성에 따라 네 가지로 나뉜다. 간선은 도심과 부도심과 주요 시설을 잇는 지역·도시 간 연계를 맡고, 지선은 도심 안에서 간선 및 시외버스와의 환승을 맡으며, 순환은 도심과 택지지구를 돌면서 간선·지선과 이어지고, 급행은 도심과 부도심을 보다 빠르게 잇는다. 실제 대도시의 버스 체계에서 쓰는 구분을 그대로 가져온 분류다.
권역은 일곱으로 나뉘고 인근 도시 두 곳을 포함해 번호는 아홉까지 매겨졌다. 0번이 한 도시의 중앙이고 1번이 그 북부이며, 2번과 3번이 다른 도시의 북부와 남부이고, 4번과 5번이 또 다른 도시의 남부와 북부이며, 6번이 다시 첫 도시의 남부다. 각 번호 아래에는 그 권역에 속한 동과 읍과 면의 이름이 적혀 있다.
번호가 도시 단위로 묶여 있지 않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한 도시의 중앙과 북부가 0번과 1번을 갖고 남부가 6번을 갖는 식이어서, 번호는 도시 경계가 아니라 지리적 위치를 따라 돌아간다. 세 도시의 버스를 하나로 묶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가 이 번호 배열에 들어 있다.
04사진이 없는 글
이 세 문서에는 건물 사진이 없다. 첫 문서에 계획도 한 장, 두 번째 문서에 계획도 한 장이 붙어 있고 세 번째 문서에는 그마저도 없으므로, 이 매거진이 다뤄 온 다른 글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여기서 보여 주려는 것이 지어 놓은 것이 아니라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매거진은 봄호에서 이 서버의 도시가 신청서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다뤘다. 좌표를 적고 도로망을 그리고 이미 지어 둔 건물을 지도 화면으로 증명해야 땅을 받는 제도였는데, 10월의 이 문서들은 그 제도의 다음 단계를 보여 준다. 땅을 받은 뒤에는 보고서를 내고, 이웃과 도로를 맞추고, 버스 번호를 나눠 갖는다.
댓글은 짧았다. 환상적이라는 말에 아직 더 보충해야 할 것이 많다는 답이 돌아왔고, 꽤 체계적이라는 느낌이 온다는 말에는 최대한 꼬임 없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답이 붙었다. 노선이 꼬이지 않게 하는 일이 이 문서를 쓰는 사람의 관심사였다.
이 사람은 같은 계절에 도시연재 게시판에도 글을 올리고 있었다. 그쪽 제목들은 이 문서들과 전혀 다른 계열이어서, 노래 제목 같은 말이 하나씩 붙어 있다. 다음 호에서 그 제목들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