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 분기점의 연혁

1976년 개통, 1978년 시 승격에 따른 개칭, 2009년 분기점 전환, 폐쇄된 구 요금소까지. 실재하지 않는 고속도로의 연혁을 백과사전 문체로 적은 도시와, 그 연혁을 실제 도로처럼 읽고 불편하겠다고 답한 독자들의 겨울.

여울JC
여울JC© 아나낫슈

도시를 소개하는 방법은 여럿이어서, 전경 사진을 올릴 수도 있고 인구와 면적을 적을 수도 있다. 겨울의 한 도시는 그 어느 쪽도 고르지 않고 분기점 하나의 연혁을 적었다.

01백과사전 문체

글은 노선 번호부터 시작한다. 경여고속도로 1번, 여울내부순환고속도로 4번, 여울 분기점(麗蔚分岐點, Yeoul Junction). 한자와 로마자 표기가 나란히 붙고 소속 노선이 먼저 나오는, 실제 한국의 고속도로 시설 정보를 그대로 옮겨 놓은 형식이다.

이어지는 본문이 연혁이다. 1976년 9월 7일, 경여고속도로의 잔여 구간인 장흥남도 당산시에서 여원군까지가 개통할 때 이 교차로는 노선의 종점인 남여원IC로 문을 열었다. 1978년에 여원군 광성읍이 여울시로 승격하면서 이름이 여울IC로 바뀌었다. 2009년 3월 16일에는 여울내부순환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기존 여울IC와 요금소를 폐쇄하고, 그 자리에 트럼펫형 분기점인 여울JC를 새로 만들었다.

등장하는 지명 가운데 실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장흥남도도 여원군도 광성읍도 여울시도 지도에 없는 이름인데, 연혁의 형식만은 흠잡을 데가 없다. 날짜가 하루 단위까지 적히고, 행정구역 승격이 지명 변경의 이유로 제시되며, 노선 신설이 시설 개편의 계기로 설명된다.

지명은 하나도 실재하지 않는데,
연혁의 형식은 완벽하다.

02승격이 이름을 바꾼다

입체교차로
입체교차로© 아나낫슈

이 연혁에서 가장 그럴듯한 대목은 1978년의 개칭이다. 여원군 광성읍이 여울시로 승격했기 때문에 남여원IC가 여울IC가 되었다는 대목인데, 실제로 한국의 도로 시설 이름이 바뀌는 순서가 정확히 이렇다.

행정구역이 개편되면 나들목 이름도 따라 바뀌고, 읍이 시가 되고 군이 구가 될 때마다 표지판이 교체된다. 도로의 이름은 그 땅의 행정 이력을 적어 두는 장부에 가깝다.

이 도시를 지은 사람은 그 순서를 알고 있었고, 그래서 도시를 만들면서 행정구역의 역사부터 만들었다. 광성읍이라는 이름을 먼저 두고, 그것이 여울시로 승격하는 사건을 만들고, 그 승격이 도로 시설의 개명으로 이어지게 했다.

03폐쇄된 것들

연혁의 나머지 절반은 폐쇄에 관한 기록이다. 여울시내 방향 램프 진입로는 나들목 시절에는 1·2차로를 모두 썼으나 분기점으로 전환한 뒤 1차로를 폐쇄했다. 범양에서 서울 방면으로 가는 램프는 폐쇄된 옛 고속도로의 일부를 활용해 운영 중이다. 그리고 옛 여울 요금소가 폐쇄된 채로 남아 있다.

지면에 실은 첫 화면에서 그 요금소를 찾을 수 있다. 올리브빛 벌판을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본 화면에서 본선과 램프가 둥근 고리를 그린다. 그 고리 위쪽으로 갈라져 나간 짧은 갈래 끝에, 부스가 늘어선 요금소 한 채가 차 한 대 없이 서 있다. 본선의 차들은 그 앞을 지나가지 않고 아래쪽 분기점으로 흘러가고, 화면 오른쪽 아래로는 청록빛 바다가 대각선으로 들어온다.

도시를 짓는 사람들은 대개 지은 것을 기록하는데, 이 사람은 폐쇄한 것을 기록했다. 쓰지 않게 된 차로, 용도가 바뀐 옛 도로, 남겨진 요금소. 실제 고속도로에도 선형을 개량하면서 버려진 구 도로와 무인화로 비게 된 부스가 있고, 도로는 개선될 때마다 조금씩 그런 자리를 남긴다.

04불편하겠네요

이 연혁에 달린 댓글에서 가상의 지명을 짚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첫 댓글은 예쁘다는 말에 이어 기존 나들목을 폐쇄하고 분기점을 설치하다니 불편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다른 댓글은 차로를 폐쇄한 대목이 인상적이라고 했고, 또 다른 댓글은 서울 느낌이 그득하다고 했다. 실재하지 않는 도시의 실재하지 않는 도로 개편을, 그 길을 실제로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아쉬워한 반응들이다.

도로의 연혁을 쓴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5월에는 어느 폐쇄된 교차로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올렸다. 40년간 한 구의 교통을 책임진 평면 교차로가 오늘부로 폐쇄되고 조금 떨어진 구역에 클로버형으로 입체화되어 다시 영업을 시작한다는, 보도자료 투의 한 문단이 본문의 전부였다.

그 글에도 댓글이 두 개 달렸다. 하나는 이설이면 위치만 옮겨야 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고, 다른 하나는 비게 된 그 자리를 고가 공원으로 만들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차도 사람도 없는 도로를 두고 도시계획 논쟁이 붙었는데, 두 사람 모두 그 도로가 실재하는 것처럼 말했다.

05단말기를 사는 편이 이롭습니다

이 사람이 쓴 도로 문서에는 연혁 말고 다른 갈래도 있다. 지난 1월에 올린 톨게이트 글은 아예 이용 안내문이었다. 어느 나라의 톨게이트들은 대부분 본선 위에 놓여 있고 전부 하이패스에 해당하는 전용 요금소라는 설명이 먼저 나온다. 그러니 그 나라의 수도순환고속도로를 이용할 차량은 전국 소매점에서 카드와 단말기를 구입해 장착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했다.

나라도 노선도 소매점도 모두 가상이다. 그런데 안내문의 어투는 실제 도로 운영 기관의 것을 그대로 옮겨 왔고,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안내라기보다 경고에 가깝다. 직접 만든 것이냐는 댓글에 그는 표지판만 만들었다고 답했다. 요금이 얼마냐고 묻는 사람과 성지순례를 왔다는 사람이 그 아래 나란히 붙었다.

지난 겨울호에서 우리는 손으로 세운 톨게이트를 두고 저러면 차단기는 내릴 수 있느냐는 물음이 달리자 하이패스라고 답한 도시를 다뤘다. 석 달 뒤 이 도시는 같은 사정을 제도로 만들어, 이용하려면 단말기부터 사라고 적었다.

06입체교차로 똥손

정작 이 진지한 연혁의 일주일 전, 같은 사람이 올린 글의 제목은 이랬다. 여울 004, 아낭이는 입체교차로 똥손. 본문은 두 글자였다. 흑흑.

자기가 입체교차로를 잘 못 만든다는 자조에 댓글은 위로가 아니라 농담으로 답했다. 자기는 입체교차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 부럽다는 말이 달렸고, 그 아래에 경제학자의 이름을 비튼 한 줄이 붙었다. 저보다 잘하신다는 댓글도 있었다.

자조는 그 전부터 있었다. 6월에 올린 다른 입체교차로 글에는 자기 도시들 가운데 가장 괴랄한 교차로 다섯 손가락에 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입체교차보다 평면교차를 선호해서 입체교차로 자체가 별로 없다는 고백이 붙어 있었다. 댓글은 그 교차로를 두고 꼭 필요한 도로가 없다고 지적했다.

만드는 실력에 대한 자신 없음과 그 시설의 역사를 지어내는 능력은 별개다. 램프의 곡선을 매끄럽게 뽑는 일과 이 분기점이 1976년에 왜 여기 생겼는지를 정하는 일은 서로 다른 재능이고, 겨울의 여울은 후자로 채워졌다.

지면에 실은 두 장 어디에도 여울 시가지는 나오지 않는다. 낮은 해가 비스듬히 드는 올리브빛 벌판과 드문드문한 숲, 그 위를 지나는 본선과 램프, 그리고 차 한 대 없는 요금소가 있을 뿐이다. 시가지가 서기 전에 40년의 연혁이 먼저 도착했다.

출처

편집 노트

이 기사에서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편집부의 해석인지 밝힙니다.

  • 연혁 전문, '입체교차로 똥손', 본문 '흑흑', 5월 폐쇄 공고문, 1월 톨게이트 안내문, 6월 JIC 자평, 댓글 인용은 원문 그대로
  • 사진 묘사(고리 모양 램프 위쪽 갈래 끝의 빈 요금소, 오른쪽 아래로 들어오는 바다, 올리브빛 벌판과 드문드문한 숲)는 지면에 실은 두 장에 보이는 범위
  • 한국 도로 시설명이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바뀐다는 설명은 편집부 배경 서술
  • '보도자료 투', '안내라기보다 경고에 가깝다', '차도 사람도 없는 도로를 두고 도시계획 논쟁' 등 해석은 편집부 논평
  • 05절의 2018 겨울호 톨게이트 기사 연결은 편집부가 이은 것이며, 두 원문은 서로를 언급하지 않는다. 두 도시는 작성자도 다르다
  • '애덤 네인스'는 애덤 스미스와 작성자 닉네임을 겹친 말장난이므로 지면에서는 닉네임 없이 '경제학자의 이름을 비튼 한 줄'로 옮겼다
  • '경여고속도로 1번 / 여울내부순환고속도로 4번 / 여울 분기점 (麗蔚分岐點, Yeoul Junction)'
  • '1976년 9월 7일 경여고속도로 잔여 구간인 장흥남도 당산시~ 여원군 구간이 개통할 때, 경여고속도로의 종점인 남여원IC로 개통했으며, 여원군 광성읍이 여울시로 승격한 1978년에 교차로 이름을 여울IC로 개칭하였다. 2009년 3월 16일 여울내부순환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기존 여울IC와 TG를 폐쇄하고, 트럼펫형 분기점인 여울JC를 개설했다.'
  • '여울시내 방향 램프 진입로로, IC 시절에는 1, 2차로 모두 사용했으나 JC 전환 후 1차로를 폐쇄하였다.' / '범양 => 서울 방면 램프는 폐쇄된 구 고속도로의 일부를 활용해 운영중이다.' / '폐쇄된 (구) 여울T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