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의 여름
'여기가 고인물 파티라고'라는 제목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여름 내내 고였다 안 고였다 하는 실랑이가 게시판의 인사말이 되었다. 여든한 장을 올린 도시, 높은 건물 하나를 두고 조언을 구한 신입, 그리고 물이 기름이 되는 농담까지.
8월 10일, 같은 날 같은 게시판에 도시 두 개가 올라왔다. 하나는 사진 여든한 장을 붙이고 한번 만들어본 도시라는 제목을 달았고, 다른 하나는 열세 장을 붙이고 여기가 고인물 파티라고라는 제목을 달았다.
뒤의 제목이 그 여름의 인사말이 된다.
01여든한 장
여든한 장을 올린 쪽은 겸손했다. 한번 만들어본 도시라는 제목 아래 본문은 두 줄이었는데, 어느 공략을 보고 만들었다는 것과 농촌과 공업지역만 창작이라는 단서가 전부였다. 한 번 만들어 봤다는데 여든한 장이다.
지면에 실은 화면은 그중 한 장이다. 바위가 드러난 언덕 아래로 도로가 지나고 그 양쪽에 초록·빨강·파랑·주황 지붕의 단층집이 늘어서 있으며, 길 이름이 도로 위에 한글로 적혀 있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게임의 도구 막대와 예산 표시가 그대로 켜져 있고, 소품 배치 제한을 풀었다는 안내 문구까지 화면 아래쪽에 남아 있다. 잘 나온 구도를 골라 다듬어 올린 사진이 아니라 플레이하던 화면을 그대로 떠 온 사진이다.
댓글에서 작성자가 자기 도시를 하나씩 가리킨다. 산업대로에는 연기 냄새가 풀풀 나고, 마을버스도 다니며, 반은 시내이고 반은 농촌이라는 것. 다음 주에도 이 도시는 계속된다는 예고까지 자기 글에 자기가 달아 두었다.
한국 도시군요, 하는 한 줄에 그는 맞다고 답한 뒤 되물었다. 어떻게 한국 도시인 것을 아셨나요. 지붕 색과 길 이름과 마을버스가 이미 답이었다. 지난겨울 우리가 다룬 관문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는지, 시티즈에서도 요금소가 있는 도시라는 인사가 달렸다. 그럼 당신 도시는 요금소가 없느냐는 되물음에는 도시가 없는데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02여기가 고인물 파티라고
같은 날의 다른 글은 자기소개로 시작한다. 소문이 나서 옆동네에서 넘어왔다는 것, 갓 600시간 넘은 입문자라는 것, 저도 고인물이 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진짜로 소품 붙이는 일의 ㅍ자도 모르는 초보라는 것.
고인물은 한 분야에 오래 머문 실력자를 가리킨다. 물이 고이면 썩는다는 부정적인 함의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오래 파고들어 경지에 이른 사람을 뜻하는 쪽으로 더 자주 쓰인다. 스스로를 입문자라 소개하며 그 파티에 끼워 달라고 적은 글이었는데, 첫 댓글이 곧바로 판결을 내렸다. 고인물 인증 글이네요.
반박은 통하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자기보다 잘하는 사람은 많다고 물러서자 해외 커뮤니티에서 이미 크게 호응을 받은 것으로 안다는 폭로가 붙었고, 600시간 초반이 같은 자기는 그저 게임을 켜 놓고 잠만 잤나 보다는 자조가 뒤따랐다. 뒤이어 이 게임의 전작부터 해 온 9년 차라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기만자라는 호칭이 붙었고, 스크롤을 내리면서 기만에 경악했다는 말에 그는 게시글 이력을 보면서 실력에 경악했다고 되받았다.
03고인물과 청정수
여름 내내 이 단어가 굴러다녔다. 고인물이 더 썩고 싶어서 오셨다니 전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에 악취가 날 때까지 하겠다는 답이 붙고, 고인물 너무 많다는 탄식에는 첨벙첨벙이라는 두 마디가 돌아왔다. 일주일 뒤에는 이젠 고인물들이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온다는 항의가 나왔는데, 급하게 청정수 방면으로 진출해야 해서 그렇다는 답에 청정수의 영역마저 넘보는 다기능 고인물이 서민 민생을 위협한다는 성명서가 이어졌다.
가장 깔끔한 정리는 한 줄짜리 대구였다. 고인물들은 청정수가 되고 싶어 하고, 청정수는 고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고인물들은 청정수가 되고 싶어 하고,
청정수는 고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점점 더 고인물이 많아지는 카페라는 말에 좋은 일이라는 답이 달린 것도 같은 댓글창이다. 실력자가 늘면 기준이 올라가고, 기준이 올라가면 자기를 초보라 부르는 사람도 늘어난다. 이 게시판에서 실력을 인정하는 말과 자기를 낮추는 말은 같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04안 고였다니까요
8월 말, 이 실랑이는 공항 게시글로 옮겨 갔다. 이번 호에서 다룬 수안국제공항이다. 너무 고이셨다는 인사가 올라올 때마다 만든 사람은 안 고였다고, 아무튼 안 고였다고 부인했고, 고! 였! 다! 하는 세 글자짜리 판결이 다시 달렸다.
농담은 곧 물에서 기름으로 넘어갔다. 저 소품들을 쓰는 것부터가 석유라는 말이 나오고, 비행기 연료 걱정은 없어 보인다기에 왜냐고 묻자 석유가 넘쳐흐르니까요, 라는 답이 돌아왔다. 마지막에는 공항 반경 50킬로미터 해역이 석유로 구성되어 있다는 속보 형식의 농담까지 나왔다. 고인 물이 오래 고이면 기름이 된다는 말장난이 나흘에 걸쳐 완성됐다.
한 달 전 궁을 산책하는 사진 아래에도 같은 단어가 있었다. 고인물에 고인 자재, 라는 다섯 마디였다. 그해 여름 이 게시판에서 잘 만든 것을 칭찬하는 말은 대체로 이 한 단어를 거쳤다.
05저 뾰족한 것

고인물 파티라는 제목을 단 글에는 사실 자기소개보다 긴 부분이 있었다. 조언을 구하는 대목이다.
도시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 하나를 바꿨는데, 크고 우람한 하얀 건물을 반짝거리는 높고 뾰족한 것으로 갈아 끼웠다는 것이었다. 야경은 정말 예쁜데 건물이 너무 높아서 도시 미관을 해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그는 적었다.
지면에 실은 화면이 그 건물이다. 허리가 살짝 잘록하게 들어갔다가 위로 갈수록 다시 벌어지는 가느다란 탑 하나가 스카이라인 한복판에 솟아 있고, 나머지 고층 건물들은 그 발치에 낮게 깔린다. 실루엣만 봐도 그가 무엇을 걱정했는지 알 수 있다.
답은 갈렸다. 도시 곳곳에 예쁜 공원을 만들어 배치하면 좋겠다는 조언에는 초기 제작 구역은 이미 손댈 수 없게 되었다는 답이 돌아왔고, 저렇게 갑자기 높은 건물이 나와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의견에는 고층 건물 갑툭튀가 마치 롯데타워를 보는 것 같다는 답이 붙었다. 자기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을 두고 실제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을 끌어와 변명하는 방식이다.
06다음 주에도 이 도시는 계속됩니다
일주일 뒤 같은 사람이 다시 올린 글의 본문은 한 줄이었다. 오늘도 꾸역꾸역 채우고 있습니다. 도시가 대단히 크다는 감탄에 그는 항공뷰를 찍을 때마다 셀프 칭찬을 하고 있지만 너무 힘들다고 답했고, 대도시라는 두 글자에는 완전 노가다라는 두 글자로 받았다.
이 매거진이 도시 하나하나를 골라 이야기로 만드는 동안, 게시판에서는 이렇게 도시가 계속 태어나고 있었다. 지난겨울 서울이 마흔일곱 장으로 완결되고 봄에 도쿄가 서른두 장으로 작별했다면, 이 여름의 여든한 장은 완결도 작별도 아니었다. 다음 주에도 이 도시는 계속됩니다, 라는 예고가 붙은 분량이다.
여름의 게시판에서는 나이트시티가 네온을 켜고, 론돈이 이층버스를 굴리고, 수안이 활주로를 놓고, 누군가는 한 번 만들어 봤다며 여든한 장을 쏟아 냈다. 그리고 그 모든 글 아래에 같은 단어가 달렸다. 고이셨네요. 안 고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