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여름, 야간개장

8월에 경복궁 사진 두 편이 올라왔다. 하나는 가을 콘셉트로 미리 심은 조경, 하나는 북악산 성곽길까지 불을 켠 야간개장. 다만 이 궁은 지난겨울 우리가 따라 걸었던 그 궁이 아니고, 두 궁은 조경 글의 댓글창에서 한 번 마주친다.

경복궁 조경
경복궁 조경© 티디비

지난겨울 이 매거진은 눈 내린 경복궁으로 한 호를 닫았다. 흰 기와지붕과 붉은 기둥, 그리고 그 궁을 여섯 편에 걸쳐 지은 사람의 연재가 컴퓨터 포맷 한 번으로 끝나 버렸다는 짧은 후일담까지.

여름에 다시 경복궁 사진이 올라왔다. 초록이 우거지고 밤에는 조명이 켜지는 궁인데, 지난겨울의 그 궁은 아니다. 그해 봄 카페에서 경복궁을 짓기 시작한 사람은 여럿이었고 이 여름의 궁은 그중 다른 하나인데, 두 궁이 한 번 마주치는 자리가 있다.

01여름에 심는 가을

8월 첫날, 본격적인 조경 작업이 시작되었다는 글이 올라왔다. 전각을 다 세운 뒤에 오는 마지막 공정으로, 나무를 심고 화초를 놓아 마당과 담장 사이의 빈 땅을 채우는 일이다.

그런데 심은 것은 여름 나무가 아니었다. 가을을 준비하며 미리 가을 콘셉트로 조경하기로 했다고 그는 적었고, 오래 걸릴 테니까요, 라는 이유를 뒤에 붙였다. 사계절 모두 아름다운 고궁이라는 한 줄도 함께 적혀 있다.

지면에 실은 화면에도 그 계절이 보인다. 경회루 연못 안에 작은 섬이 둘 앉아 있고 담장 아래로는 짙은 상록수가 빼곡한데, 그 사이사이에 붉고 분홍빛이 도는 나무가 규칙 없이 섞여 있다. 8월에 올라온 사진에서 단풍이 먼저 눈에 들어오자, 어째 첫 사진부터 가을 느낌이 나더라는 댓글이 달렸다.

답이 재미있다. 작년 가을에 다른 회원이 올린, 단풍잎으로 물든 산속 한옥 스크린샷을 떠올리며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 해 전 남이 찍은 화면 한 장이 이 궁의 조경 기준으로 남아 있었다.

02풀 한 포기마다

원래 이 정도까지 울창하지는 않다는 단서를 그는 먼저 달았다. 실제로 고궁에 가 보면 꽤나 공원 같은 느낌이 나고 서울 시민 중에는 유료 공원처럼 고궁을 자주 들락날락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 한국 건축이 자연친화적인 느낌이 강해 잘 어울린다는 것이 그가 든 근거다.

마음껏 심지는 못했다. 풀을 하나하나 배치할 때마다 프레임이 잘려 나가는 압박감이 느껴진다고 그는 적었는데, 궁 하나를 통째로 세운 화면에 풀까지 얹으면 화면이 버티지 못한다. 그래도 자연 속의 고궁을 만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말로 그 문단이 끝난다.

경회루 옆이라 더더욱 녹음이 잘 녹음이라는, 말장난인지 오타인지 알 수 없는 한 줄도 그 아래 있다. 반년 전 그는 이 연못에 물을 채웠다. 그전까지는 진짜 물이 아니라 물 그림을 깔아 두었고, 여러 도구를 써 봐도 결과가 불만족스러워 어설프게 할 바엔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며 미뤄 두었던 일이다. 물을 채운 김에 연못 안의 두 섬까지 손을 봤고, 그 둘레에 나무를 심을 차례가 이 여름에 왔다.

03밤에 문을 열다

야간개장
야간개장© 티디비

같은 날 궁은 밤에도 문을 열었다. 꼭 해 보고 싶었습니다, 가 야간개장 글의 첫 문장이다.

잘된 부분과 잘되지 않은 부분이 나란히 적혔다. 스포트라이트 조명을 자재의 겉면이 너무 반사해 버려 지나치게 밝게 빛난다는 것이 불만이었고, 대신 북악산에 현실과 비슷하게 조명을 달고 있는 디테일도 봐 달라는 부탁이 이어졌다.

사진에 그 둘이 한 화면으로 들어 있다. 광화문과 긴 궁장이 하얗게 타오르듯 빛나 담장의 결이 뭉개져 있고, 그 뒤 어두운 산등성이에는 주황빛 점들이 한 줄로 이어져 비스듬히 올라간다. 깨알 성곽길 재현이라는 댓글이 그 점들을 정확히 짚었다. 앞의 절에서 다룬 능선 고증이 같은 달의 일이니, 이 사진에서 실제와 맞춘 것은 궁만이 아니라 그 뒤의 산등성이이기도 하다.

다른 반응도 있었다. 산불 난 줄 알았다는 말이었고, 곧바로 죄송하다는 말이 뒤따랐다. 사과가 붙은 이유는 그 농담이 향할 자리가 이 게시판에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04다른 궁의 안부

조경 글의 댓글창에서 짧은 대화가 오갔다. 숲 경복궁이라는 말을 들으니 제 것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요, 라고 한 사람이 적었다. 지난겨울 우리가 여섯 편에 걸쳐 따라 걸었던 그 궁을 지은 사람이다.

답은 세 글자였다. 불 숲.

숲 경복궁이라는 말을 들으니
제 것이 떠오르는 건 어째서일까요.

지난 호에서 우리는 그 궁에 불이 여러 번 났다고 적었다. 영추문이 타고 세종문화회관이 탔으며,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나무를 타고 번지는 불길 사이로 헬기가 경회지에 물을 뜨러 내려갔다. 숲이 우거진 궁과 숲이 타 버린 궁이 한 줄씩 주고받은 뒤, 대화는 파란 게 예쁘다는 말과 진짜 아쉽다는 말, 너무 아쉽다는 말로 끝난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궁을 지었다는 사실이 이 대여섯 줄에 가장 분명하게 남아 있다.

같은 댓글창에는 오늘날의 경복궁 모습도 꽤 예쁜 것 같다는 말도 있었다. 다만 민속박물관은 빼고. 지난겨울 우리가 다룬 궁에서 가장 오래 골칫거리였던 건물이고, 한국식 목탑에 해당하는 자재가 없어 다른 나라의 탑으로 대신했다가 결국 근정전 두 채를 붙여 다시 만들었던 그 건물이다. 궁을 짓는 사람이 여럿이어도 걸리는 자리는 같았다.

05다음 계절의 예고

이 여름의 궁은 궁 안에서 멈추지 않았다. 조경 글의 댓글에서 그는 서울광장 옆에 자재를 하나 놓아 본 이유를 밝혔는데, 그 앞 도로를 지하로 내리고 덕수궁 대한문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구한말의 새로운 중심지를 다시 구현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제일 기대되는 부분이라는 답이 그 아래 달렸다.

궁을 완성한다는 말과 궁을 살게 한다는 말은 다르다. 건물은 한 번 세우면 서 있지만 조경은 계절마다 바뀌고, 밤이 되면 같은 담장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여름에 가을 나무를 심고 밤에 조명을 켜는 일은 궁을 더 짓는 일이라기보다 궁에 시간을 들이는 일에 가깝다.

계절이 바뀌면 같은 길도 처음 걷는 길이 된다. 이 매거진이 첫 호에 내건 말인데, 이 여름에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같은 길을 계절을 바꿔 다시 걷는 사람이 있고, 다시 걸을 길을 잃은 사람이 그 옆에 댓글을 단다. 너무 아쉽죠.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말이다.

출처

편집 노트

이 기사에서 어디까지가 기록이고 어디부터가 편집부의 해석인지 밝힙니다.

  • 조경 방침·가을 콘셉트·프레임 압박·야간개장 소감·북악산 조명은 원문 본문 그대로, 04절의 대화는 댓글 그대로
  • hero 화면 묘사(연못 안 두 섬, 상록수 사이에 섞인 붉은 나무)와 03절 화면 묘사(하얗게 뭉개진 궁장, 산등성이의 주황빛 점들)는 지면에 실은 두 이미지에 보이는 범위
  • '산불 농담이 향할 자리가 실제로 있었다'는 편집부 해석이다. 원문에서 사과한 이는 이유를 적지 않았다
  • '궁을 완성한다는 말과 궁을 살게 한다는 말은 다르다' 문단은 편집부 논평
  • 실제 경복궁의 여름 야간개장은 사실이나 원문이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본문에서 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