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눈이 내릴 때까지
궁장과 육조거리에서 태원전과 향원정까지, 한 궁궐이 통째로 다시 세워진 과정을 삼문삼조의 구조를 따라 읽는다. 없는 자재를 대체하고 어긋난 축을 맞추며 엿새 만에 완성된 궁은, 연재가 끝난 뒤 컴퓨터를 포맷하면서 사라졌다.
궁궐은 한 채의 건물이 아니라 하나의 질서다. 《주례고공기》가 정한 삼문삼조(三門三朝)에 따르면 제왕의 궁궐에는 세 개의 문과 세 개의 영역이 있어야 하는데, 신하들이 국사를 논하는 외조(外朝)와 왕이 정사를 보는 치조(治朝), 왕과 그 가족이 사는 연조(燕朝)로 나뉜다. 경복궁에서 이 셋을 가르는 문이 각각 광화문과 근정문, 향오문이다.
2018년 봄, 그 질서를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일이 여섯 편의 연재로 기록됐다. 글쓴이가 적어 둔 실제 공사 기간은 엿새였다.
01어느 시절의 궁인가
경복궁은 1394년에 짓기 시작해 이듬해 완공한 조선의 정궁으로, 정도전이 '큰 복을 누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뒤에는 그 땅이 길하지 못하다는 이유까지 붙어 270년을 빈터로 있었고, 흥선대원군 때 겨우 중건됐으나 얼마 못 가 다시 비었으며, 일제가 총독부 청사를 세우며 전각 대부분을 조직적으로 헐었다.
해방 뒤에는 개발 논리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1968년의 콘크리트 광화문과 1972년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이 들어섰다. 1995년 총독부 청사 철거를 시작으로 2001년 흥례문 권역과 2010년 광화문이 차례로 되살아나며 복원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니 '경복궁을 다시 세운다'는 말에는 곧바로 물음이 따라붙는다. 어느 시절의 경복궁인가.
이번 재현이 고른 답은 2018년의 경복궁이었다. 고종 때의 궁으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한옥 자재가 넉넉지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는 현실이 앞섰고, 전각 수가 적은 현재를 기준으로 빠르게 세우기로 했다. 복원이라기보다 기록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02궁장, 그리고 궁 앞의 길

첫 삽은 궁 안이 아니라 궁 밖에서 떴다. 궁성(宮城), 또는 궁장(宮墻)은 궁궐을 감싸는 담으로, 경복궁의 궁장은 담에 더해 남쪽의 광화문과 동쪽의 건춘문, 서쪽의 영추문, 북쪽의 신무문과 동십자각으로 이루어진다.
그 앞으로 육조거리가 뻗는다.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의 관아가 있던 곧은 대로로, 조선시대부터 지금과 비슷한 폭을 지녔고 광화문통에서 세종로로, 다시 세종대로로 이름을 바꿔 가며 여전히 국가를 상징하는 도로로 남아 있다.
거리에 먼저 들어선 것은 궁이 아니라 광화문 시민열린마당이었다. 조선시대에 의정부가 있던 자리이고 지금은 의정부 터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곳인데, 보도를 깔고 화분과 울타리를 소품으로 얹어 마무리했다. 발굴이 끝나면 의정부 건물이 복원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도심 녹지로 두는 편이 보기 좋다고 그는 적었다.
이어서 세종문화회관과 주한미국대사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섰다. 회관은 마땅한 자재가 없어 여러 건물을 섞어 만들었고, 대사관과 역사박물관은 본래 쌍둥이 건물이지만 현실에서 한쪽이 리모델링을 거친 차이까지는 구현되지 않아 똑같은 건물 두 채가 되었다. 세종대왕 동상 자리에는 앉은 자세의 자재가 없어 서 있는 세종대왕이 들어섰다.
궁 앞의 길을 먼저 세운 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이 궁은 도시에서 떼어 낸 유적이 아니라 도시의 한복판에 있다.
03축이 맞지 않는다는 것
이 작업에서 가장 자주 나온 말은 축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궁의 배치도를 화면 위에 겹쳐 놓고 그 선을 따라가려 했지만 겹쳐 놓은 그림 자체가 조금씩 어긋나, 궁 전체가 동쪽으로 살짝 쏠렸다. 흥례문 권역을 세울 때는 광화문과 치조의 축이 맞지 않아 광화문을 통째로 돌려야 했는데, 돌리는 과정에서 문이 비틀리는 바람에 결국 다시 세웠다. 강녕전도 중심축에서 어긋나 한 번 헐고 다시 지었고, 동측과 대칭이 맞지 않던 서측 행랑은 아예 철거했다.
금천 북쪽 담장에서도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이번에는 신무문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는데, 신무문은 청와대와 축을 공유하므로 그 결정은 아직 세우지도 않은 청와대까지 동쪽으로 밀어 놓는 결정이 되었다.
축을 맞추는 일은 궁 안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위도와 경도를 현실과 같게 넣었더니 정오에 해가 북쪽에 떴고, 남북이 뒤집힌 것을 확인한 그는 위도를 반대로 고쳤다. 문 하나를 옮기면 아직 없는 건물까지 함께 옮겨지고, 좌표 한 줄을 고치면 해 뜨는 방향이 바뀐다.
04없는 것으로 지은 궁

궁 안의 첫 건물은 뜻밖에도 국립민속박물관이었다. 유교 왕조의 법궁 자리에 선 불교식 건축이고, 실제로 선원전 자리를 밀고 지어진 건물이다. 재현에서도 이 건물은 골칫거리였다. 한국식 목탑에 해당하는 자재가 없어 처음에는 다른 나라의 탑으로 대신했다가 나중에 근정전 두 채를 붙여 다시 만들었는데, 어느 쪽이든 멀리서도 잘 보이는 실루엣이 궁의 경관을 자꾸 건드렸다.
두 번째 건물은 국립고궁박물관이었다. 이쪽은 궁의 경관과 비교적 잘 어울려 호평받는 건물인데, 비슷한 자재가 없어 검은 지붕의 서양 건물 하나를 놓고 그 둘레를 한옥으로 둘러싸는 방식으로 지었다. 치조에는 근정전과 근정문, 둘을 잇는 행랑이 들어섰다. 근정문 자리에는 형태가 비슷한 흥례문을 대신 놓았고, 행랑은 가정집 자재를 이어 붙여 만들었다.
대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궁궐의 장을 보관하던 장고에는 항아리 자재가 없어 드럼통을 늘어놓았고, 경회루 연못을 파낸 흙으로 쌓았다는 아미산은 정확한 구현이 불가능해 흙둔덕 하나로 만족했다. 향원지 동쪽의 낮은 동산인 녹산은 자세한 설명을 찾지 못해 야트막한 언덕에 나무를 가득 심는 것으로 대신했다.
가장 정확하게 재현된 자리는 주차장이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궁궐을 관리하는 전각들이 있어야 하지만 2018년의 경복궁에는 주차장이 있고, 그래서 그는 주차장을 만들었다.
장난도 한 번 있었다. 근정전을 완벽하게 가리도록 조선총독부 자리에 다른 나라의 의사당 건물을 세워 본 뒤, 흙먼지를 날리며 무너뜨려 싱크홀만 남기고 지웠다. 괘씸해서 신개념 싱크홀 공법으로 철거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태원전은 반듯하게 서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관사가 들어서며 경복궁 서쪽 궁장이 잘려 나갔고 태원전이 있어야 할 궁역도 함께 잘렸는데, 그래서 실제 태원전은 서쪽이 잘려 나간 모양으로 복원돼 있다. 재현도 그 잘린 모양을 그대로 따랐다. 태원전 남쪽에는 문경전과 회안전이 있던 빈 전각 터를 그대로 두었고, 복원 사업 4단계에 속해 2030년대에나 채워질 자리라는 설명을 붙였다.
실제 태원전은 서쪽이 잘려 나간 모양으로 복원돼 있다.
재현도 그 잘린 모양을 그대로 따랐다.
05물과 불

연조는 가장 넓고 가장 오래 걸렸다. 경회루부터 시작했는데, 한국에서 부피가 가장 큰 전통 건축물을 세우려고 근정전 자재를 끌어다 쓰고 기단을 지면 아래로 눌러 박았다. 연못을 파고 물을 부었으나 하필 경사가 완만한 자리라 물이 자꾸 흘러나갔고, 바닥은 결국 돌로 발랐다. 연못 바닥을 콘크리트로 두르면 어떡하느냐는 댓글에 그는 개발시대의 산물이라고 답했다.
원래는 실제처럼 북쪽과 동쪽 담장만 세워 경회루를 조망하게 하려 했지만 호수 모양이 볼품없어 사면에 담장을 두르기로 바꿨다. 그다음은 동궁과 소주방, 생물방, 자경전, 강녕전과 그 좌우의 경성전·연생전, 교태전이 차례로 들어섰고, 마지막이 향원정과 함화당·집경당, 그리고 궁 속의 궁이라 불리는 건청궁이었다.
공사 중에는 예정에 없던 사건이 이어졌다. 궁 안에 삽을 뜨기도 전에 영추문에 불이 붙었고, 세종문화회관을 짓는 중에는 회관과 정부서울청사 별관, 세종로 공원이 함께 탔다. 두 건물은 진화되는 듯하다가 불이 인접한 청사 본관으로 옮겨붙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도 불이 났다. 나무를 타고 번지는 불길 사이로 헬기가 물을 뜨러 경회지로 내려갔고, 소방차가 와서 어찌어찌 진화됐으며, 화마가 지나간 자리가 남았다. 실제였다면 많은 왕실 유물이 소실되는 대사건이었을 텐데, 보기 드문 화재인 만큼 사진을 많이 찍어 두었다는 말이 그 아래 붙었다. 그는 화재 예방 예산을 올리고 궁에 구역을 설치해 정책을 눌렀다.
불타는 문화재가 안타깝다는 댓글에 숭례문 화재가 떠오른다는 말이 이어졌고, 무너지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답이 달렸다.
06눈이 내리고, 궁이 사라졌다

공사는 엿새 만에 끝났다. 향원정에 조명을 달고 남측 궁장을 따라 스포트라이트를 깔면서 현존하는 경복궁의 모든 전각이 세워졌고, 다음 편에서는 서촌과 북촌을 구현하고 세종대로를 마무리하겠다는 예고가 붙었다.
그 예고 아래에 말줄임표가 하나 놓여 있다. 그리고 본문과 다른 어조의 두 줄이 이어진다. 그러나 경복궁은 갑작스러운 컴퓨터 포맷으로 소실되고, 경복궁 주변 구현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한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다. 경복궁 프로젝트 끝.
댓글에는 한정된 자재로 대단한 일을 벌였는데 끝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말이 달렸다. 타임스톤으로 원하는 부분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으니 서울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하게 되리라는 농담이 뒤따랐고, 답은 짧았다. 이제 모두 끝났어.
석 달 뒤인 8월, 카페에 눈 내린 경복궁 사진이 올라왔다. 여섯 편을 쓴 사람의 궁은 아니었다. 그해 봄 카페에서 경복궁을 짓기 시작한 사람은 여럿이었고, 그중 한 궁이 겨울을 맞았다.
기와지붕이 하얗게 덮이고 행랑의 붉은 기둥만 줄지어 남았다. 궁 뒤의 산까지 새하얘진 것을 보니 신비롭다는 댓글에, 도로가 잘 보이지 않게 찍었더니 옛 조선에 눈이 내린 모습과 닮지 않았을까 싶다는 답이 달렸다. 실제로 사진 오른쪽 위 구석에는 차선이 그어진 현대의 도로가 조금 남아 있다.
게임에서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지만 실제 고궁에 눈이 쌓이면 기와의 색과 흑백으로 대비되어 자연미가 배가된다고, 사진을 올린 이는 덧붙였다. 궁을 세우는 동안 사람들은 축과 대칭과 자재를 이야기했다. 눈이 내리자 그 이야기가 전부 지붕 아래로 들어가고, 흰 지붕과 붉은 기둥과 그 사이로 뻗은 담장만 남았다.
이 궁이 던진 물음 — 어디까지 되살려야 하는가 — 은 이번 호 Culture 섹션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