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드라이브 깊숙한 곳
봄의 이틀 사이에 두 사람이 각자의 드라이브를 열었다. 파일명을 그대로 제목으로 쓴 백열일곱 장, 본문 없이 올라온 '고대자료' 예순여덟 장, 도로 색으로 연대를 맞히는 댓글, 그리고 창작마당에서 내려간 자재가 옛 게시글에서 다시 발견된 이야기.
3월 중순의 이틀 사이에 두 사람이 각자의 하드디스크를 열었다.
하나는 제목이 파일명 그대로였다. 2015-03-12_00001. 사진이 백열일곱 장 붙어 있었다. 다른 하나의 제목은 이랬다. 컴퓨터 E드라이브 아래,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고대자료.
01파일명이 제목이 될 때
2015-03-12_00001은 게임이 스크린샷을 저장할 때 자동으로 붙이는 이름이다. 촬영 날짜와 일련번호가 전부인 그 이름을 그는 손보지 않고 그대로 게시글 제목으로 옮겨 왔다. 본문에도 한 줄이 있었는데 그것 역시 파일명이었고, 이번에는 그해 3월에 찍힌 파일이었다. 다섯 해 차이 나는 파일 이름 두 개가 제목과 본문에 하나씩 놓였다.
먼저 달린 반응은 장수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을 백 장 넘게 올렸다는 데 놀란 댓글에 이어, 한 번에 올릴 수 있는 장수에 제한이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붙었다. 그건 사진 올리는 창에서만 걸리는 제한이라 여러 번 나눠 올리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머지 반응은 짧았다. 발전이 장난없다는 말, 그날의 기억이라는 말, 그리고 자기는 초기 사진 자료가 없다는 말.
지면에 실은 첫 화면이 그 글에 붙은 사진 가운데 하나다. 맑은 낮에 가로수가 우거진 대로를 조금 높은 데서 내려다본 구도인데, 베이지색 중층 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서고 횡단보도와 인도에 사람들이 흩어져 있다. 하늘에는 새 한 마리가 떠 있고 화면 가장자리는 부드럽게 흐려져 있다.
02고대자료와 근대유물
다른 사람은 자기 폴더를 고대자료라고 불렀다. 본문은 아예 없고 사진만 예순여덟 장이었는데, 첫 댓글을 작성자 본인이 달았다. 밀덕질, 프롭질, 상황 꾸미고 놀기. 싹수가 노랬다는 자평이었고, 대충 2017년 무렵 사진들이라는 설명이 뒤에 붙었다.
너무 길어 보기 쉽지 않으니 나눠 올리자는 말에는 딱히 중요한 짤은 없어 보여서 이다음부터 쪼개 올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스무 장을 더 올렸다. 제목은 고대까진 아니고 근대유물이었다.
근대 쪽 설명은 조금 더 길었다. 마지막 세 장 빼고는 다 한 도시이고, 대충 18~19년 무렵 사진이며, 그때보다 나아진 것은 후처리와 배경 반사뿐인 느낌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다섯 해 치를 한꺼번에 펼쳐 놓고 나서 그가 자기 실력에 대해 내린 평가가 그것이었다.
댓글에서는 옛 사진을 두고 감상이 오갔다. 아름답다는 말에 그는 구라파적 매력과 근대적 매력이 합쳐진 무언가라고 답했고, 다음에는 공업 단지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에는 산업지대는 저때 실컷 만들어서 이제 안 건드린다고 답했다. 은근히 다양한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에는 파리풍도 했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03새까만 도로

지면에 실은 두 번째 화면이 그 고대자료 가운데 하나다. 바다를 낀 비탈에 빨강과 분홍과 청록으로 칠한 중층 아파트가 빽빽하게 서 있고, 그 사이를 새까만 넓은 도로가 굽어 지나간다. 곶에는 풍력발전기 세 대가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마른 언덕이 이어지며, 그늘이 짙어 화면 전체가 어둡다.
댓글에서는 그 도로 색을 두고 연대 추정이 붙었다. 18년도 사진도 비슷한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새까만 도로는 어느 회원의 트레이드마크였다는 지적이 나왔고, 마지막 사진들이 실제로 18년도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직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말이 그 아래 달렸다.
도로 포장 색 하나로 사진이 찍힌 해가 맞았다. 이 취미의 지층은 확장팩이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뉘기보다, 그 무렵 누가 무엇을 즐겨 썼는가로 나뉜다.
04내려간 자재
발굴이 실제로 무언가를 건져 올린 대목은 따로 있었다.
한 사람이 스물두 번째와 스물세 번째 사진의 자재를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었다. 답은 작성자가 아니라 옆에서 보던 사람에게서 먼저 나왔다. 어느 제작자의 자재인데 창작마당 규정에 맞지 않아 내려갔다고 들었다는 것이었다.
작성자는 그 제작자가 카페에 올려 둔 것이 있을 거라고 했고, 처음 답한 사람이 오래된 글을 찾아 주소를 붙였다. 물어본 사람은 드디어 찾았다며 고마워했다. 작성자가 그 글을 보고 남긴 말은 그때 그 시절 유물이라는 것이었다.
창작마당에서 내려간 자재가 몇 해 전 카페 게시글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스크린샷을 뒤지다 그것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고, 자재를 찾던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자기 것을 얻었다.
창작마당에서 사라진 자재가
카페의 옛 글에는 남아 있었다.
05다시 열어 본다는 것
옛날에 만들었다가 방치한 도시를 다시 꾸미는 것도 재밌겠다는 제안에 작성자는 짧게 답했다. 그러다 자괴감 무한대 찍는다고. 와우라는 감탄에는 우리 모두 뉴비이던 시절이 있었다는 답을 달았다.
지난 봄호의 통계청 연재도 비슷한 일을 했다. 자기가 만든 옛 도시를 다시 방문해 인구와 생일을 기록하는 연재였는데, 그쪽은 세이브 파일을 열었고 이번의 발굴은 스크린샷만 남은 도시를 다뤘다. 세이브 파일이 없으면 도시는 사진으로만 존재한다.
이 매거진이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나간 계절의 게시글을 다시 열어 읽고, 사진을 고르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적는다. 다만 우리는 남의 폴더를 뒤지고 저 두 사람은 자기 폴더를 뒤졌다. 자기가 만든 것을 자기가 발굴하면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함께 오고, 그때의 실력과 지금의 실력이 나란히 놓인다.
봄의 이틀 동안 백열일곱 장과 예순여덟 장과 스무 장이 차례로 올라왔고, 그 사이에서 오래전에 내려간 자재 하나가 다시 주소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