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백색도시
가을에 요새를 쌓던 판타지 영상 연재가 겨울에 광장과 시장을 지나 백색관문에 닿았다. 도시에 이름이 없어 만든 사람이 독자에게 이름을 물었고, 정작 연재의 이름은 어느 게임의 마을 배경음악에서 왔다는 사실이 댓글에서 밝혀졌다.
지난 가을호에서 우리는 눈 덮인 산으로 간 사람을 다뤘다. 네온의 도시를 짓던 그가 유럽풍 판타지 도시를 시작해 계절 내내 요새를 쌓았고, 그 도시를 회차로 나누어 영상으로 올리기 시작했다.
겨울에 두 편이 더 나왔는데, 3화가 광장과 시장이고 4화가 백색관문이었다.
01연말이라 늦었습니다
이 연재의 속도는 회사 일정에 매여 있었다. 12월 7일 그는 사진 한 장을 올리면서, 연말이라 회사 일이 너무 바빠 일주일 손을 놓고 있다가 드디어 앉았다고 적었다. 퇴근하고 세 시간 만에 다음 회차의 배치를 잡았고 이제 좀 쉬면서 소품 디테일에 들어간다고, 기다리는 분들에게 송구하다고 했다.
댓글에는 명작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이 달렸고, 답으로는 너무 추워서 옥수수차를 마시며 하다 보니 슬슬 졸리다는 근황이 왔다. 연말이니 눈 내리는 도시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의 영상을 하나 보여 주면 좋겠다는 제안에는, 12월 중순쯤 스페셜 영상을 하나 더 만들어 볼까 생각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고, 닷새 뒤 3화가 올라왔다.
02광장과 시장

3화의 인사말도 사정 설명으로 시작한다. 날씨가 춥고 손발이 차가워진다는 말, 연말이라 일이 바빠 업로드가 늦어 송구하다는 말. 그러고는 이번 편이 도시를 더 확장하는 시발점이라 디테일에 많이 신경 썼다고 덧붙였다.
신경 쓴 흔적은 사진에 그대로 있다. 광장 한복판에 분수가 있고 그 둘레로 차양을 친 좌판이 빽빽하다. 과일 바구니와 꽃 상자, 끈으로 묶은 붉은 짐짝과 손수레가 돌바닥에 널려 있고 건물 사이에는 삼각 깃발이 줄줄이 걸렸다. 한쪽에는 천문시계가 달린 석조 탑이 서 있고 붉게 물든 나무 몇 그루가 좌판 사이에 끼어 있으며, 사진 앞쪽으로는 전차 선로가 지나간다.
판타지 도시의 문법에서 이 순서는 정확하다. 성이 서고, 성 아래 광장이 생기고, 광장에 시장이 선다. 중세 유럽 도시가 실제로 그렇게 자랐다. 영주의 성이 보호를 제공하면 그 범위 안에서 교환이 일어나고, 교환이 정기화되면 시장이 된다.
2018년 겨울호의 첫 기사가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그때 우리는 천오백 년을 떠돌던 시장이 2003년에야 주소를 얻었다고 적었다. 사이버펑크 도시를 짓던 사람이 판타지로 건너와 제일 먼저 만든 것도 광장과 시장이었다. 댓글에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다는 말과 진짜 판타지 영화에 나올 법하다는 말이 나란히 달렸다.
03백색관문
4화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올라왔다. 도시 내부를 마무리하고 도시 입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설명의 전부였고, 그 입구가 이 연재를 통틀어 가장 널리 퍼진 이미지가 되었다.
흰 석조로 된 거대한 관문인데, 베일을 쓴 두 조각상이 양쪽에 서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고 그 사이 좁은 통로에는 붉은 기둥이 세로로 박혔다. 관문 좌우로는 흰 성벽이 화면 밖까지 이어진다. 통로 너머로는 도시가 보이는데, 첨탑과 성채, 초록 돔과 붉은 지붕이 언덕을 따라 층층이 올라가고 아래쪽에는 노랗게 물든 가로수와 좁은 길이 있으며, 선로 한 줄이 관문을 통과해 그 길로 이어진다.
관문이 하는 일이 이 한 장에 다 있다. 문틀이 시야를 좁히면 그 안의 풍경이 액자에 담긴다. 아무 데서나 보면 그냥 도시인데, 관문 사이로 보면 한 장면이 된다.
관문은 막는 장치가 아니라
보여 주는 장치다.
규모에 대한 반응이 곧바로 달렸다. 미쳤느냐는 감탄과 함께, 자기는 맨정신으로 절대 못 할 규모라는 말과 사람만 많이 돌아다니면 다른 게임인 줄 알겠다는 말이 붙었다.
04이름을 물었더니 다섯 개가 왔다
4화 본문에는 예상치 못한 부탁이 하나 있었다. 도시 전체가 백색도시가 되었는데 아직 이름을 짓지 못했으니 도시 이름을 한번 추천해 달라는 것.
연재를 시작한 지 두 달, 요새를 쌓고 광장을 만들고 관문까지 세운 도시에 이름이 없었다. 그 사정은 댓글에서 곧 정리됐다. 레온하르트가 도시 이름이 아니었느냐는 물음에, 그것은 대륙 전체의 이름이고 그 안에 저런 도시가 부분적으로 여럿 있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답을 들은 사람은 곧바로 후보를 냈다. 비스베르크, 알팅겐, 레스너, 노이바덴, 키르헤슈펜. 한 줄에 다섯 개였다.
도시에는 대개 이름부터 붙이는데, 백색도시는 그 순서가 거꾸로였다. 지난 봄호에서 우리는 고치현을 옮겨 지으며 지명부터 정한 도시를 다뤘고, 지명을 정하지 않으면 도로에 이름을 붙일 수 없다고 그때 적었다. 백색도시는 형태가 먼저 생기고 이름이 나중에 왔으며, 그 이름조차 혼자 정하지 않았다.
05이름은 음악에서 왔다
정작 연재의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다른 댓글에서 밝혀졌다. 배경음악이 너무 잘 어울리는데 무슨 곡이냐는 물음에, 로스트아크의 레온하트 마을 배경음악이라는 답과 함께 주소가 하나 붙었다.
마을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냐는 반응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막상 음악에 맞는 이름이 이것뿐이더라고.
순서를 다시 세워 보면 이렇다. 먼저 음악이 있었고, 음악에 붙어 있던 마을 이름이 대륙의 이름이 되었으며, 그 대륙에 지어진 도시는 이름 없이 관문까지 완성되었다. 이 연재가 영상 연재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나는데, 화면보다 소리가 먼저 정해진 작업이었다.
0612월 31일의 힌트
한 해의 마지막 글은 다음 회차의 힌트 사진이었다. 빠른 칼퇴근 후에 후딱 마무리해 완성하고 이제 편집에 들어간다는 말과 함께, 이번 편부터는 녹음해서 내레이션으로 진행해 보려는데 이놈의 감기가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붙었다.
힌트 사진을 두고 스팀펑크 느낌이 난다는 댓글이 달리자 테마가 스팀펑크 판타지라는 답이 왔다. 한 달 전 그가 문득 생각나서 만들었다는 비행선도 그 테마 안에 있었다. 차기 예고냐는 물음에는 즉흥적으로 만들어 본 것이라 답했고, 힌덴부르크냐는 물음에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멋진 체펠린 비행선이 있길래 썼다고 답했었다.
티저가 먼저 올라오고, 본편이 공개되고, 마지막에 다음 화의 힌트가 걸린다. 연재물의 목표는 완결이 아니라 다음 화다. 감기가 낫는 대로 이 도시는 목소리를 얻을 예정이었고, 이름은 해가 바뀌도록 아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