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현, 지명을 한자로
일본 시코쿠 고치현의 지형 위에 지은 도시. 지명은 한자 음 그대로 우리말로 읽어 스사키를 수기시로, 사카와를 좌천읍으로 바꿨고, 방음벽과 아파트와 나들목은 한국에서 가져왔다. 버스 5003번과 두 개로 갈라진 시가지의 기록.
2019년 2월, 사진 스물세 장이 본문 한 줄 없이 올라왔다. 제목에는 일본 고치현 지형에 만든 도시라고만 적혀 있었다. 말을 먼저 건 쪽은 댓글이었다. 숨은 고수가 나타났다는 인사에 이어, 너무 화려하지도 너무 단순하지도 않은 그 적절한 중간값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감상이 붙었다.
고속도로가 무슨 자재냐는 물음에는 도시고속도로 계열을 쓰는데 만드는 법이 일반 고속도로와 비슷해 다루기가 가장 편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고치라는 이름을 두고 누에고치는 어디 있느냐는 농담도 달렸다. 지형을 고른 이유는 조금 뒤에 밝혀졌다. 맵을 알차게 채워 보고 싶어 일부러 개발할 수 없는 땅이 많은 지형을 골랐다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이 정도면 미사를 뺀 하남시쯤은 나올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
01지명을 정해 두고 가야겠습니다
3월 10일, 그는 버스 노선도를 한 장 올리고 확실히 노선이 많긴 하다고 적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목록을 하나 붙였다. 지명을 정해 두고 가야겠다는 말과 함께였다.
스사키 시는 수기시, 도사 시는 도사시, 사카와 정은 좌천읍. 일본어 지명을 한자 음 그대로 발음한 거라는 한 줄이 목록 끝에 붙어 있었다. 같은 글자를 두 나라가 다르게 읽는 한자 문화권에서만 나오는 방식으로, 지명을 새로 지어내는 대신 있던 글자를 그대로 두고 읽는 방식만 바꿨다.
걍 일본어 지명을
한자 음 그대로 발음한 겁니다.
노선도와 지명 목록이 한 글에 나란히 놓였다. 노선도에는 정류장 이름이 들어가고 정류장 이름은 지명에서 나오니, 노선을 그리는 일이 이름을 정하는 일을 앞당겼다고 볼 만하다.
025003번

노선도를 펴 놓고 보면 이 도시가 왜 그렇게 버스에 매달렸는지가 보인다. 시가지가 지도의 북동쪽과 남서쪽에 하나씩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산과 빈 땅이다. 두 시가지를 잇는 굵은 선 두 가닥이 산악지대를 크게 우회해 돌아 나간다.
도시가 두 곳으로 나뉘어 있어 저런 노선이 나오는 모양이라는 관찰에, 철도도 사람이 많고 버스는 미어터진다는 답이 붙었다. 중복 없이 새 노선을 파기 힘들었겠다는 말에는 수요가 중심지로 몰리다 보니 어느 정도 중복은 불가피하다고 했고, 초장거리 노선이라는 감탄에는 현실 노선과 비교하면 밥이라고 받았다.
교통난은 겨울부터 이어진 문제였다. 2월 중순에는 쉰두 대로 운행해도 역부족이라는 말과 함께 출퇴근 사진이 올라왔다. 그 무렵 승객 수 1위를 달리던 노선이 5003번 광역버스인데, 번호가 5003인 이유는 그저 쓰고 있던 이층버스 자재가 5003번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역철도를 뚫어 주니 승객이 줄긴 했다는 말이 그 아래 붙었고, 닷새 뒤에는 기어코 하루 800명을 넘겨 버린 5003번이라는 설명이 다시 나왔다.
03코리안 스타일
2월 17일에 올라온 사진 가운데 고속도로 방음벽이 있었다. 어느 고속도로에서 본 듯하다는 댓글에 그는 이게 바로 코리안 스타일이라고, 다만 자재는 중국과 일본 것이라고 답했다. 기본 도로를 거의 쓰지 않는 이유도 비슷했다. 기본 도로가 못생겼다기보다 아시아 스타일이 나오지 않아 손으로 만든 도로를 쓰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지형만 시코쿠였을 뿐 그 위에 올라간 것은 대체로 한국이었다. 철도역 옆에는 부영 아파트가 입주했고, 이어서 코스트코와 신세계백화점이 들어섰다. 노선에는 경춘선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고속철도는 SRT였다. 4월에 난개발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사진에는 수도권의 어디가 생각난다는 댓글이 달렸는데, 곤지암과 에버랜드 쪽을 짚어 낸 사람에게 그는 보는 눈이 대단하다며 그쪽을 모티브로 했다고, 모현도 함께 참고했다고 답했다.
일본 지명을 우리 음으로 읽어 붙인 그 도시 안에서, 논과 하천 사이를 달리는 것은 경춘선이었다.
04부지가 좁아서 저렇게
3월 11일 글의 사진 가운데 나들목이 하나 있었다. 설명은 네 글자, 인터체인지 편-안. 어디를 참조했는지, 아니면 직접 지어낸 것인지 묻는 댓글에 그는 판교분기점을 조금 참조했는데 트럼펫형으로 하려다 부지가 좁아 저렇게 내주었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다른 댓글이 붙었다. 화원옥포와 상관의 나들목이 같은 구조라는 지적이었다. 저런 분기 형태로 된 나들목이 실제로 있긴 했다며, 직접 비교해 보니 상관 쪽과 더 비슷하다고 그는 답했다. 땅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낸 형태가 이미 어딘가에 놓여 있는 형태였다.
05하이퍼 리얼리즘을 위하여
3월 중순, 그는 도시의 기본적인 틀이 어느 정도 갖춰졌으니 슬슬 남은 공간을 메우기 시작해야겠다고 적고 산골짜기를 넘어가는 2차선 도로를 첫 결과물로 올렸다. 현실 고증이 대단하다는 반응과 일본 여행에서 본 풍경 같다는 감상이 나란히 달렸다. 이틀 뒤에는 비닐하우스가 들어섰는데, 하이퍼 리얼리즘을 위해 만들어 줬다는 설명과 함께 새까만 비닐하우스가 없는 게 흠이지만 나름 만족한다는 말이 붙어 있었다.
그 무렵의 도시에는 어설픈 항구가 있고, 파는 사람이 사라진 수산시장이 있고, 작동하는 지하주차장이 있었다. 3월 19일에 사진을 한꺼번에 풀면서 그는 주유소와 도로와 나무를 빼면 나머지는 모두 기본 자재라고 밝혔다. 절과 등산객, 판다 보호구역, 실업률 1퍼센트, 교통 흐름 88퍼센트가 그 스물다섯 장에 함께 들어 있었다. 도시 규모에 비해 흐름이 좋은 것은 설계를 잘해서인 듯하다고 그는 적었다.
4월에는 그동안 진전이 없던 동쪽을 대규모로 개발했다. 아파트를 도배하니 인구가 순식간에 5만에서 7만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흘 뒤, 그는 노선도를 한 장 더 올리며 한 줄을 남겼다. 교통이 제일 중요합니다, 시린이 여러분.